믿음은 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중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면서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믿음은 순종의 동기를 제공한다. 
  믿음은 인내할 힘을 준다. 

1.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미끄러진 어떤 사람이 작은 나뭇가지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가까스로 나무에 매달린 그가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쩡쩡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믿느냐?"
     "누구세요?"
     "주(LORD) 하나님이다. 나를 믿느냐?"
     "네, 네. 믿어요. 믿고말고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러면 나뭇가지를 놓아라. 내가 구해주겠다."
     "네? 뭐라구요?"
     "나뭇가지를 놓아라."
     "나뭇가지를 놓으라고요?"
     "그렇다."
     잠시 생각하던 그 사람이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거기 다른 사람 없어요?"


만약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로 믿었다면 나뭇가지를 놓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뭇가지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믿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놓으라고 하든지 매달리라고 하든지 기꺼이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든지 자기 생각에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할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2. 믿음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코카콜라(The Coca-Cola Co.) 의 경영진들은 회사를 움직이는 동기를 하나의 문구로 요약하여 콜라 상자에 새기기를 원했다. 그들은 콜라 상자에 "짜릿한 맛"이라고 인쇄한 다음, 시음(試飮) 테스트에서 이전의 콜라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것을 입증받은 "뉴코크(New-Coke)"라는 신제품을 출시(出市)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신제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코카콜라 경쟁사인 펩시콜라(PepsiCo, Inc.) 에 참패를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짜릿한 맛"이라는 문구를 "미국의 전통"이라는 문구로 대체한 후, 원래의 코카콜라를 다시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미국의 전통"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원래의 코카콜라로, 그것이 애플파이나 야구 같은 미국적인 것임을 대중에게 호소하면서 차근차근 시장을 점유하여 마침내 명예를 회복했다. 
기업이 자기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기를 명쾌하게 정의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상자에 문구를 기록해야 한다. 그 상자 안에는 오직 한 개의 물건, 곧 각자의 인생이 들어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한 가지 문구만 기록할 수 있다. 그 문구는 아마 "예수님"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안생의 상자에 "예수님"이라고 기록할 때, 신기한 마력 같은 게 나와서 우리 남은 삶이 평온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보증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인생이 평탄하든 괴롭든 우리 인생의 기본 동력(動力)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나타낼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 남은 삶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될 것이라고 보증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2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했다.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하나님께 바칠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3. 믿음은 순종의 동기(動機)를 제공한다.

믿음은 순종, 평화, 소망의 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Pascal)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행복을 갈구한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은 다 이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 나가고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 행복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은 다르지만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는 동일하다. 인간은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 행복이 모든 사람의 동기이다. 심지어 목을 매는 사람도 행복을 위해 목을 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좋은 것을 주거나 해로움을 막아주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갈구하고 또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는 파스칼의 말이 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거나 해로움을 막아주기 위해 무엇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는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거역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생의 한 지점에서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죄의 자리에 가게 되는 일들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신형자동차를 구입하거나 멋진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궁핍한 이웃을 구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주는 행복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인색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제공하는 기쁨은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관대한 마음이 주는 기쁨보다 오래 가지 못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영혼은 금세 시들어버린다.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결코 아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언제나 순종한다. 교회에 사람들이 북적거려도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든 까닭은,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길이 깊고도 오래 지속되는 평화와 사랑과 희락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 아니라 잠깐 있다 사라지는 행복을 더 줗아한다. 

"죄의 호흡법"으로는 단거리를 달릴 수 있어도 장거리를 달릴 수 없다. 반면 "의의 호흡법"으로는 단거리를 달리기 어려울지 몰라도 장거리를 수월하게 달릴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진리를 알지도 못하며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 진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의의 호흡법을 택할 것이다. 믿음이 순종할 힘을 준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4. 믿음은 인내할 힘을 준다. 

  제 길로 잘 가던 인생이 갑자기 항로를 바꾸어 우리 복부를 세게 강타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나지?",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고 질문하고픈 유혹에 시달린다.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마치 개구장이 아이들을 혼내주는 어머니처럼 현장으로 급히 출동하여 이러한 질문의 폭풍을 진압한다믿음이 우리 질문에 언제나 대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핵심을 말한다. 

첫째, 믿음은 하나님이 선하시며 전능하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 삶에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기 위해 나쁜 것들을 사용하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롬 8:28)라고 했다. 
이 구절은,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믿음은 우리가 시련을 통해 강해질 것이라고, 시련이 없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운동선수가 자신의 신체적인 "쾌감대"(쾌적함을 느끼는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고, 피아노 연주자가 자신의 손가락이 느끼는 쾌감대를 넘어서지 못하면 뛰어난 연주자가 될 수 없고, 학자가 자신이 누리는 정신의 쾌감대를 넘어서지 못하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자신의 영적인 쾌감대를 넘어서지 못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 삶에 고통이 극심하여 모든 것을 그만두고픈 유혹이 들 때, 능히 견디도록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제공하실 것이며(고전 10:13), 그 시련을 통해 우리를 더 성숙하고 완전하게 만들 것이라는(약 1:2-4) 것을 믿음은 말해준다
믿음은 우리가 받은 고난이 천국에서 몇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성취했던 중요한 일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들 대부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신 더 어려웠을 뿐 아니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값진 보상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우리 고난이 이생에서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생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내세에서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 (롬 8:18)라고 선언했다. 
만일 당신이 "천국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것을 보상해주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야"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천국은 우리의 상상력이나 이해력을 초월하는 실로 아름다운 곳임에 틀림없다. 전쟁포로가 된 사람이 얼마나 두려워할지 상상해보라. 우리는 그 사람의 공포를 짐작하지 못한다.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는 한  상상도 하기 어렵다.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은 순종할 동기를 제공할 뿐 아니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결론

  시련은 우리를 영적 쾌감대 너머로 데려간다. 시련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시련은 혼란과 불확실함을 낳고, 심지어는 포기하고픈 욕구와 반항하고픈 욕구를 낳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예비된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만 하늘의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 그리고 기꺼이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시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삶에 고통이 극심하여 모든 것을 그만두고픈 유혹이 들 때, 능히 견디도록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제공하실 것이며(고전 10:13), 그 시련을 통해 우리를 더 완벽하고 완전하게 만드실 것이다(약 1:2-4).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절반의 순종만으로도 느긋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고 또 당신이 스스로에게게 원하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일들을 수행할 힘과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힘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실망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김희옥 목사 

부산성서침례교회

 

 
XE1.11.6 Layout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