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김정식 2015.09.10 11:29 조회 수 : 512

* 야고보書 講解說敎 # 26 2009. 3. 1(午前)

 

너희 生命이 무엇이냐?(What is your life?)

 

야고보書 4:13-17

 

□ 序論

1995年 6월 29日 千 餘 名의 死傷者를 낸 三豊 百貨店 崩壞 事件은, 참으로 表現하기 어려운 慘憺하고 가슴 아픈 慘事였다. TV의 모든 채널을 占領했던 그 映畵 같은 慘狀은 언제고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結婚式을 올릴 新郞이 죽었다. 結婚 7年 만에 겨우 겨우 얻은 5代 長孫인 아들과 滿朔된 아내를 잃었다. 어려서 盲人이 되었지만 自己와 같은 障碍者들을 돕겠다고 盲啞學校 敎師가 되어 그들을 熱心히 가르치던 誠實한 處女가 죽었다. 엄마에게 집을 사주겠다고 熱心히 일하던 孝誠스러운 딸도 죽었다. 네 살배기 외아들을 돌보기 爲해 며칠 後에 그 百貨店을 그만두려고 했던 젊은 엄마도 죽었다. 數年 前에 테러 事件으로 아버지를 잃고서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고 美國에서 碩士 卒業을 했던 有能한 딸도 죽었다. 夫人과 두 살 난 아들, 한 살 난 딸, 그리고 留學을 마치고 돌아온 妻弟까지 온 家族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젊은 檢事의 家族도 있었다. 한결같이 所重한 人生들이 하루아침에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때 나는 그 事件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重要하지만 大部分의 사람들이 한 번도 深刻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質問을 내 自身에게 던졌다.“人生이란 果然 무엇인가?”

그렇게 쉽게 가는 것이 人生이라면, 우리들이 세우는 計劃이나 우리가 가진 꿈은 다 무엇인가? 그토록 쉽게, 虛無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人生이라고 하면 도대체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爲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果然 人生이란 무엇인가?”라고 質問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난 2001年 9月 11日, 그러한 質問을 또다시 던질 수밖에 없는 事件이 美國에서 發生했다.

五 千 名 以上의 死亡者를 낸, New York Trade Center 飛行機 terror 慘事 事件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事件을 바라보면서, 또다시“果然 人生이란 무엇인가?”라고 質問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質問은 慘事를 當한 家庭이나 惑은 遺族들만이 던져야 할 質問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生命보다도 돈을 더 貴重하게 여겼던 破廉恥한 사람들, 그 慘事의 責任者이며 原因 提供者였던 사람들이 던져야 할 質問이다.

그리고 나라꼴이 그 地境이 되도록 觀望만 하고 있었던 腐敗한 官吏들과, 돈돈 하며 돈밖에 모르는 오늘날의 現代인들이 던져야 할 質問이다. 하나님은 本文 말씀을 通해서“人生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謙虛하게 서서 하나님의 音聲에 귀 기울여야 한다.

1. 至極히 짧은 人生

“…너희 生命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니라.”(4:14)

(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人生本質

『人生은 至極히 짧다』는 것이다. 人生이 얼마나 짧은가?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오늘 있다가 來日 사라져 버리는 存在들이라는 말이다.

人生이란 아무리 길다 하여도 하나님의 永遠性 앞에 照明하여 볼 때 水蒸氣와 같다. 人生이란 長久한 人類 歷史에 比하면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에 不過하다.

『暫時 나타났다가』에서『나타나다』라는 그리스語 單語는“暫時 빛난다.”는 뜻이다. 人生은 暫時 반짝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人生은 얼마나 짧은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告白을 들어보라.

“보소서, 主께서 내 날들을 한 뼘만큼 되게 하셨사오니 내 時代가 主 앞에는 없는 것 같아오며…”(시 39:5)

『겨우 한 뼘 넓이만 한 것이 우리의 人生』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人生을 어떻게 만드셨는가? 한 뼘 넓이만 한 人生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人生이라는 것은 한 뼘 넓이만큼 밖에 안 된다.

히브리語의 原語를 보면“네 손가락”이라는 뜻이다. 손가락 넷, 이것이 우리들의 人生이다. 우리 人生의 年數가 팔십이라고 하면 이 손가락 하나가 20年이란 말이다. 이토록 짧은 것이 우리의 人生이다.

오래 살았다고 말하지만, 지나고 보면 人生은 없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내 時代가 主 앞에는 없는 것 같아오며” 라는 말은, 永遠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人生이라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는 意味이다.

(2) 詩人哲學者들이 말하는 人生

詩人과 哲學者들은 人生의 짧음을 이렇게 表現했다.

“人生이란 砂漠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두 個의 永遠 사이로 스쳐가는 時間의 짧은 흐름이다.”

“새가 空中으로 날아감과 같다.”

“時間의 急流 위에 떠오르는 물거품 같은 人生이여!”- Edward Young

“暫間 있다 없어지는 너 그림자여!”- W. Shakespeare

John Adams 大統領이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젊은이가 人事를 하면서, “ Adams 大統領 閣下, 그 동안 平安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John Adams 大統領은 “Adams는 平安한데, Adams의 집이 다 낡아서 서까래가 무너져 只今 기둥을 막대기로 버티고 있네. Adams는 곧 이사가야 되겠네." 라고 對答하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肉身의 帳幕이 다 낡아서 肉身의 主人인 靈魂은 永遠한 나라로 移徙가야겠다는 말이다. 젊은이들은 이 말이 實感이 안 나겠지만, 人間이 100살을 산다고 해도 눈 깜박할 사이에 그 時間이 지나간다.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면 싱싱하던 풀이 다 시들어 죽는 것 같이 人間의 肉體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人生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人生은 너무 짤막한 限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人生은 짧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爲해 살 時間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길 時間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時間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으로 속지 말아야 한다.

오늘이 바로 主님을 爲해 살 날이다! 그렇게 살면 우리 生이 언제 끝난다 해도 우리는 우리를 向한 하나님의 計劃을 成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聖經에 나타난 많은 比喩

聖經에는『水蒸氣, 빠르게 달리는 사람, 한번 내쉬는 숨 그리고 한 줄기 煙氣』等 이 땅에서의 삶이 짧고, 一時的이며, 瞬間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爲한 많은 比喩가 있다.

“(우리는 겨우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며 또 땅 위에 있는 우리의 날들은 그림자이므로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느니라.)(욥 8:9).

다윗은 “나는 땅에서 나그네이오니 主의 命令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19)라고 했고, 베드로는 “너희가 여기에 暫時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벧전 1:17)고 했다.

聖經은 反復해서 이 世上에서의 삶을 外國에서 暫時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곳은 우리의 永遠한 집 또는 最終 目的地가 아니고, 暫時 地球를 지나가며 訪問하고 있다는 것이다.

聖經은『巡禮者, 外國人, 訪問客, 손님, 旅行者』等의 語彙를 使用해서 世上에서의 짧은 時間을 表現하고 있다.

나그네란 一時的으로 外國에 滯留하면서 法的인 權利를 가지지 못한 者들을 말한다. 居留民은 거쳐 가는 길손으로 定着者가 아닌 者, 外國 旅行客을 뜻한다. 그리스도人은 暫定的으로 이 땅에 있는 나그네요, 居留民일 뿐이다.

(4) 우리가 絶對 잊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事實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許諾하신 삶을 가장 價値있고 意味있게 最大한 活用하기 爲해서는 두 가지 事實을 絶對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는 永生에 比해 이 땅에서의 삶은 至極히 짧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일들을 할 時間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죽을 것 같고 千年萬年 살 것 같은 錯覺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生命의 짧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때로는 너무 빨리 닥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 使用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計劃을 세워 놓았든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을 通해 어느 때고 그 計劃들을 遮斷시킬 수 있다는 事實을 알아야만 한다.

둘째는 地球라는 곳은 우리가 臨時로 居住하는 場所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그리 오래 머무를 것이 아니기에 지나친 愛着을 갖지 말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 世上에서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祈禱해야 한다.

삶에 對한 우리의 觀點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 우리의 觀點은 우리가 時間을 어떻게 投資하고, 돈을 어떻게 使用하며, 才能을 어떻게 活用하고, 關係(하나님과 사람)에 얼마만큼의 價値를 두는지에 크게 影響을 미친다.

卽, 삶을 어떻게 定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모습이 決定된다. 야고보는 마치 自身이 땅에서 永遠히 살 수 있을 것처럼 將來의 計劃을 세우는 사람들을 向해 警告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祈禱하여야 한다.

“主(LORD)여, 나로 하여금 終末과 내 날들의 限界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軟弱存在인지 알게 하소서." (시 39:4)

2. 未來가 不確實한 人生 4:14

來日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4:14)

(1) 聖經挑戰

하나님이 말씀하신 人生의 또 하나의 本質은 人生은 未來가 不確實하다는 것이다. 聖經은 “오늘이나 來日 우리가 어떤 都市에 가서 한 해 동안 거기 머물며 사고팔고 하여 利得을 얻으리라”(13節)하는 者들에게 이렇게 挑戰한다.

“來日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4:14). 또 箴言 記者는 “너는 來日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잠 27:1)警告 하였다.

하루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人生이다. 13節에 보면 사람들은 1年 동안의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一 年을 計劃하면서도 눈앞의 來日 있을 일을 豫測하지 못하는 不確實한 人生이다.

이렇게 우리는 未來가 不確實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人生은 來日 있을 일을 알지 못하는 不確實한 人生이다. 그런데 우리는 來日 있을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마치 安全한 것처럼 行動하기 일쑤다.

그래서 많은 境遇 暫時 이곳에 暫時 살다가 가게 된다는 事實을 잊고 산다. 그리고 이 事實을 認識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傲慢한 自己 充足的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그러나 人生은 짧고 또 不確實하다. Seneca는 “來日 일을 우리가 알 수 없는데 一生의 計劃은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말하였다. 聖經은 計劃性 있는 삶을 否定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없는 計劃은 未來가 保障받지 못한다. 記憶하는가? 누가福音에 나오는 어리석은 富者의 比喩를….

(2) 어리석은 富者의 헛된 자랑

예수님의 比喩에 나오는 어리석은 富者는 自身의 삶의 보람을 張次 누리게 될 즐거움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더 큰 곳간을 짓고 여러 해 동안 人生을 즐기려고 많은 財産을 蓄積하였다.

그러나 그의 計劃에는 하나님이 빠져있다.

“또 내 魂에게 말하기를, 魂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物件을 쌓아 두었으니 便安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2:19)

이는 21 世紀를 사는 사람들의 motto(信條)와 비슷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 밤 富者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어리석은 者여, 이 밤에 네게서 네 魂을 要求하리니 그러면 네가 豫備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어리석은 富者는 農産物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곳간을 넓히는 일에 着手할 만큼 未來指向的인 眼目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의 未來는 不確實하며 우리의 人生 또한 不確實하다. “너희 生命이 무엇이냐?” 그 對答은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한 번 휙 쏘여지는 蒸氣)이다.

우리는 땅 위에 머무는 동안 恒常 이 敬虔한 眼目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3)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아야 한다.

우리의 未來와 우리의 人生은 不確實하다. 야고보는 우리의 生命을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와 比較하여, 우리 人生의 不確實性을 例를 들며 說明하고 있다.

그러므로 主님은 우리들에게『日用할 빵』을 爲해 祈禱하라고 말씀하시며 한 번에 하루씩 살 것을 가르치셨다(마 6:11, 6:33-34). 그리고 하나님께서 子女들을 돌보시며 그들의 祈禱를 들으신다고 約束하셨다(마 6:25-34).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必要한지를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弟子들에게 來日 입고 마시고 먹는 問題를 가지고 念慮하지 말고, 오히려 오늘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 6:25-34).

聖經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떤 方法으로 自身과 家族들을 保養해야 하는지를 言及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르침은 恒常 하나님을 依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文脈 안에서 주어졌다.

3. 虛無한 人生 4:14

“…너희 生命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니라.”(4:14)

(1) 우리가 반드시 記憶해야 할 必要가 있는 事實

하나님은 本文에서 人生의 또 하나의 本質을 말씀하고 있다. 곧 “人生은 虛無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 生命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니라.”(약 4:14)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詩篇 39篇에서도 다윗을 通해『虛無한 人生』이 證言되고 있다. 人生이 虛無하다는 것, 이것은 確實한 事實이다. 얼마나 虛無한지 詩篇 記者는 “分明히 모든 사람은 헛된 모습 속에 걷는다.”고 說明한다(시 39:6).

여기서『헛된 모습』은 虛像이라는 뜻이다. 있는 것 같지만 實狀 가서 만져 보려고 하면 없는 게 虛像이다. 뭔가 있는 것 같지만 結局 아무 것도 없는 구름처럼 아무 것도 없는 것, 그런 것이 人生이다.

“虛像같은 것, 水蒸氣 같은 것, 무지개와 구름”같은 것이 우리의 人生이다. Edward Young이란 神學者는 “時間의 急流위에 떠오르는 물거품 같은 人生이여!”라고 말하였다.

W. Shakespeare는 “暫間 있다 없어지는 너 그림자여!”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있다가 來日 사라지는 存在들이다.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시들어 떨어지는 꽃잎처럼, 우리 人生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人生이다.

우리는 來日 어디에 있을지 전혀 모른다(사 40:6-7, 욥 13:25, 14:2). 그처럼 우리의 人生은 짧고 不確實하다. 우리들의 時間은 우리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있다.

비록 우리들이 將來에 먹고 살 것을 잘 장만해 놓았더라도 우리 손에 정말 들어있는 삶은 오늘 現在 이 時間의 삶뿐이다. 이 오늘은 하나님이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 人生의 焦點과 主님께 對한 奉事의 求心點은 來日이나 모래도 아니고 오늘 現在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未來 計劃이나 永遠한 運命이 重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人間이 將來의 運命을 主題넘게 作定하고 自身이 統制할 수 있는 것처럼 錯覺하는 過誤를 指摘한 말이다.

(2) 聖經이 가르치는 虛無한 삶

聖經은 이 虛無한 삶을 가리켜 “모든 肉體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榮光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벧전 1:24). 모든 人間의 肉體는 싱싱하게 자라다가 눈서리가 내리면 시들어 없어지는 풀과 같다.

人間의 肉體는 풀과 같아서 매우 軟弱하다. 項羽 같은 壯士라도, 天下를 號令하는 大統領이나 財閥 總帥라도, 콩알 만 한 銃알에 맞아도 죽고, 마티즈 같은 작은 車에 치어도 죽는다.

때로는 물에 빠져서 죽고, 惑은 交通事故로도 죽으며, 드물게는 飛行機가 떨어져서 죽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주 健康했었는데, 아침에 코털 하나 뽑았는데 그것이 禍根이 되어 그날 밤 破傷風으로 죽는 境遇도 있다.

그리고 풀의 꽃과 같이 人間의 幸福과 榮光은 곧 사라지고 만다. 出世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榮光을 누린다고 좋아하지만, 今方 시들어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몇 년 前 이 나라를 號令하던, 前職 두 大統領이 逮捕되어 拘置所에 收監되는 것을 보았던 것을 記憶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人間의 모든 榮光은 풀의 꽃과 같음을 잊어선 안 된다.

(3) 그러므로 우리는 永遠한 나라에 所望을 두고 살아야 한다.

熱心히 뭘 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다 헛된 일을 爲해서 奔走하고 搖亂하게 騷動을 피우며 人生을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成功이라고 말하는 瞬間도 事實 實體를 살펴보면 다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肉體를 더 以上 依支하지 말고, 永遠한 나라에 所望을 두어야 한다. 依支하지 못할 것을 依支하게 되면 그 依支했던 것이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지고 만다.

暫間 있다가 없어지는 水蒸氣같은 肉體를 依支하면 永遠한 所望과 天國을 놓쳐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가장 重要한 것은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子女가 되고 永遠한 所望을 얻는 것이다.

“꿈결 같은 이 世上에 산다면 늘 살까, 人生의 享樂 좋다고 해도 바람을 잡은 것이구나, 險한 世上 苦難風波 一場春夢 아닌가. 슬프다. 人生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 復興聖歌 中에서

우리의 날은 빨리 달려가는 競走者 보다 더 빠르고, 먹을 것을 낚아 채가는 독수리의 迅速함과도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 욥기 14章에는 人生의 虛無함에 對한 內容이 記錄되어 있다.

“女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날수가 적고 괴로움으로 가득하며 꽃과 같이 자라나서 꺾이고 또한 그림자처럼 사라지며 繼續해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1-2)

詩篇 記者는 빠르게 지나가는 生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告白한다.

“그런즉 우리에게 우리의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우리가 智慧에 이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쓰게 하소서.”(시 90:12)

참 아름다운 祈禱이다. 우리의 날이 每日 지워져 가고 있으며, 우리는 죽음을 向해 걸어가고 있으며, 죽음이 우리를 向하여 臨迫해 오는 事實을 記憶할 때 우리는 새로운 智慧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는 年歲가 많이 드셔서 年老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꽃다운 靑春이 엊그제 같은 생각이 드는데, 어느새 白髮이 휘날리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아졌고, 눈도 어둡고 齒牙도 많이 빠지고 허리가 굽어 버렸다.

어느 그리스의 哲學者가 사랑하는 弟子에게 質問을 받았다. “先生님, 人生은 도대체 이 짧고 虛無한 世上에 왜 태어났을까요?” 그러자 그 哲學者는, “그것은 永遠의 價値를 알기 爲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人生 속에는 永遠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時間의 虛無를 通해서 비로소 永遠의 意味를 배우는 것이다. 이 時間의 虛無性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永遠의 값어치를 알게 된다.

時間의 虛無를 經驗하지 않고서 永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永遠은 무척 따분할 것이다. 貴한 것을 貴한 것으로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리스 哲學者의 告白은 매우 智慧롭다.

하나님은 永遠의 意味를 깨우쳐 주기 爲해서 우리에게 짤막한 人生을 주셨다.

4. 限界가 있는 人生

“主여, 終末과 내 날들의 限界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軟弱存在인지 알게 하소서”(시 39:4)

(1)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事實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事實, 惑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잊어버리고 사는 한 가지 重要한 事實이 있다. 人生에는 終末이 있고, 定해진 限界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마지막을 맞게 된다.

어떤 英雄이나 偉人도 죽음과 싸워 이긴 적이 없다. 人生은 限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人生이 든든한 人生이 아니라 軟弱한 人生이며, 强한 存在가 아니라 弱한 存在임을 徹底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내 날들의 限界인 죽음을 認識하고 그 죽음을 準備하는 사람은 智慧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죽음을 認識하고 그 죽음을 準備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人生을 바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알고 準備하며 살아갈 때, 罪도 멀리 하게 되고, 더 意味 있고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傳道書 記者는 이렇게 말했다. “哀哭하는 집(初喪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전 7:2).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 왜 그렇게 죽음이 두려운 것일까? 肉體의 죽음 以後에 있게 될 하나님의 審判 때문이다(히 9:27). 그러므로 죽음의 恐怖를 解決하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모든 罪를 容恕함 받아야 한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오늘도 無事히”라는 祈願을 하면서도, “죽음을 準備하는 삶”은 살지 않는다. 죽음의 現實을 알고 날수를 세며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智慧로운 사람이다.

한 로마의 皇帝는 人生을 嚴肅하게 살아가는 智慧를 얻기 爲하여, 그의 臣下가 每日 아침 問安을 할 때마다 “陛下이시여! 죽음을 記憶하십시요”라고 하도록 命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臣下의 人事를 通해 죽는다는 事實을 記憶하고 그의 삶에 對한 智慧를 얻을 수 있었다고 告白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現實을 妄覺하고 그것을 準備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Charles H. Spurgeon 牧師는, 죽음을 準備하지 않는 사람, 그는 單純히 바보 程度가 아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다.”라고 했다.

(2)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人生의 덧없음을 얘기할 때 어떤 사람들은,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어떻게 살아야 價値있게 살 수 있을까?” 이렇게 謙遜한 態度를 보인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먹고 즐기자. 이 짧은 人生, 늙기 前에 餘恨없이 즐겨야지….” 이렇게 人生을 하루살이처럼 取扱하는 사람이 있다.

無意味한 人生을 實感하면서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 中에 하나가 物質이다.

財物이 自身의 삶에 어떤 意味라도 줄까 해서, 財物을 쌓지만 다 써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여기에 財物의 虛無가 있다. 西洋 俗談에 “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다.

멋진 말이다. 壽衣에 주머니 달린 거 봤는가? 그거 必要 없다. 아무 것도 못 가져간다. 그러면서도 그 虛無한 財物을 쌓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人生이다(例話/“알렉산더 大王”).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願하시는 反應을 보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敬畏하고 그 命令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14). 하루하루 흘러가는 이 時間을 어떻게 보내야 價値있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루아침에 悲劇的인 慘事로 人生을 끝내 버리거나, 하루하루 無意味하게 보내다가 人生을 끝내거나, 虛無하게 끝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도 所重한 人生이요, 所重한 歲月인 것이다.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쏟아 버리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單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너무도 所重한 人生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 當身은 어떤 意識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언젠가 내 人生이 끝나리라는 事實을 認識하고, 그 마지막을 準備하며 살아가는가? 萬一 오늘밤이 여러분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만날 準備가 되어 있는가?

“萬若 오늘밤이 여러분의 마지막이라면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와 함께 永遠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確信하고 있는가?”사람들은 普通“죽음을 마치 나에게는 없을 것 같은 例外 條項”으로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을 認識하며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은 죽음이 現實이 아니라 生疎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삶에는 반드시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認識하고, 그 마지막을 準備하며 살아야 한다.

人生이란 아무리 길다 하여도 하나님의 永遠性 앞에 비추어 볼 때 暫時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水蒸氣와 같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사람들은 人生이 永遠히 持續될 것같이 살아간다.

우리는 恒常 우리의 삶이 어느 날 반드시 中斷된다는 事實을 記憶할 必要가 있다. 그럴 때 人生을 바라보는 우리의 視線과 삶의 態度가 顯著히 달라질 것이다.

□ 結論

밀라노의 大聖堂에는 들어가는 門이 셋이 있는데, 첫째 門은 arch인데 “모든 즐거움은 暫間이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둘째 門은 十字架形인데 “모든 苦痛도 暫間이다" 라고 새겨져 있고, 셋째 門에는 “오직 重要한 것은 永遠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 人生의 모든 즐거움이나 모든 苦痛은 다 暫間일 뿐이다. 그러므로 永遠한 것을 붙잡기 前에는 卽, 永遠한 所望을 얻기 前에는 참 平安과 기쁨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人間은 하나님의 形狀대로 지음 받은 永生하는 存在이며 靈的인 存在이기 때문이다.

生命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生命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고(사 38:10-20), 그 뜻에 順從하고(레 18:5) 하나님의 뜻을 行하며(마 6:10; 7:21) 살아갈 때 더욱더 豊盛한 生命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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