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훈련

진경호 2016.07.02 23:23 조회 수 : 519

"그러나 속되고 늙은 부녀들이 꾸며 낸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성품(godliness)에 이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디모데전서 4:7)

사도 바울은 훈련의 개념을 영적 생활에 적용했다. 그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성품(godliness/경건)에 이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고 말했다. "훈련"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체육관을 의미하는 gymnasium이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했다. 이 말은 신약시대에는 "운동", 또는 "훈련"을 의미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성품(godliness/경건)에 이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는 의미이다. 그는 영적 훈련을 강조했다. 
사도 바울은 아침 조깅보다 영적 훈련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하나님의 성품(godliness/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다가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느니라."(딤전 4:8)고 말했다. 영적 훈련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다. 영적 훈련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자신의 일상 속에 의미 있게 자리잡기가 불가능하다. "훈련(exercise)"이란 용어는 도전과 의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웬지 듣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럽고 어려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영적 훈련을 받지 않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 영적 훈련은 신앙생활의 성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적 훈련은 결코 쉽지 않다. "고통 없이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격언처럼 영적 훈련은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성취된다. 운동선수들은 우승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고통스런 훈련을 기꺼이 감내하고, 멋진 몸매를 원하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운동에 전념한다. 하지만 영혼을 위한 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영적 훈련은 왜 필요할까? 요즘 교회 안팎을 둘러보면, 잘 훈련된 영적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적다. 물론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그랬잖아요?"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영적 훈련이 잘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이 형편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게을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율법주의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이다. 
경건한 삶을 "율법에 치우친 형식적인 삶" 또는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삶"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율법주의는 좌절과 영적 죽음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경건의 삶은 율법주의와 다르다. 결정적인 차이는 내면의 동기에 있다. 율법주의는 자아 중심적인 반면에, 경건한 삶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율벚주의자는 "공로를 세워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 영적 훈련의 핵심으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있다. John Wesley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움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오, 하나님. 제 영혼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셔서 오직 주님만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더 많이 알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주님을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제 안에 주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열심을 주시고, 주님의 징계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주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맡길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제 입술의 모든 말과 제 손의 모든 일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진리를 고백하며, 모든 사람에게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도록 권고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제 삶이 되게 해주소서."
 

김희옥 목사 

부산성서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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