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사람을 대하라.

김정식 2015.09.10 11:30 조회 수 : 804

* 야고보서 강해설교 # 14 2008. 9. 21(오전, 오후)

 

은혜로 사람을 대하라!

 

야고보서 2:5-7

 

□ 서론

우리는 야고보서 2:1-4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에 대하여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에서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곧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을 외모로 취하느냐 어떠냐를 살피기 전에 우선 나 자신에 대하여 먼저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즉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외모로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절대로 외모로 취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내가 재물이 있고 없고,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고…이런 것들은 결코 문제가 안 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왕국이 나의 영원한 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이면 된다.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 그만이다. 그가 구원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 밖의 것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을 차별대우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전 4:5).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내가 남을 판단할 수는 없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는 기준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는 기준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는 기준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2:5)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실 때에는 조건이 없다.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은혜』이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애정으로 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은혜로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상관 없이『은혜로 대해야』한다.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면 실패와 오류의 연속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신다. 인내와 은혜로 우리를 대하여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우리로 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은혜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1.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사람을 대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2:5)

A.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야고보서 2:5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영적인 축복을 묘사하기 위해,『택하다(ejklevgomai- chosen)』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야고보가 가난한 자들에 관한 말을 했을 때, 그는 세상적인 판단기준상 가난하다고 지칭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은 돈이 없는 자들이고 우리처럼 부요한 사회에서 그 가치가 경시되는 자들이다.

물론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을 말한다(마 5:3).

사실, 주님의 복음을 처음 접하였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가난한 자들이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거의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사회 체계 안에서, 가난한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좋은 소식』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그 사회에서 중요한 존재들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는 매우 중요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우리 중 비교적 소수만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둘러보라.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이 아닌가?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렇다고 가난한 자들은 자동적으로 천국에 가고 부자들은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이 더 자신의 무력함을 잘 인식한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더 쉽다.

이 세상의 부자들이 구원을 얻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들의 교만이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에게는 쓰라린 삶의 경험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

B.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대하시는 대로 그들을 대하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겼다(2:2-4).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차별대우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는(경멸하는) 것이다(2:6).

 

“가난한 자를 멸시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존중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질서를 뒤집는 일이다.”- John Calvin

그런데 이런 처신의 죄는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한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불신하고 주님 자신을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서의 독자들이 업신여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눅 4:18).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부한 자들도 구원하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있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C. 부자와 구원

부자는 그들의 부로 인해 영적으로 덜 갈급해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더욱 쉽사리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부 자들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것을 부여하고, 부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도 빈손으로 나아와 구원의 선물을 받아야 하며, 가난한 자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렇지만 부자들에게 있어 자신을 그렇게 까지 낮추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부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부자 청년 치리자의 경우를 통해 그 실례를 볼 수 있다(눅 18:18-30).

누가복음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비교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자는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영적인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 들이지 않았다. 반면 나사로는 신분이 거지였으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다. 그들이 죽었을 때, 부자는 지옥으로 갔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올리어 갔다.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그의 부 때문이 아니었고, 다만 자기 영혼에 대한 관심의 부족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약 2:5)

여기서 말하는 부는 믿음의 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에 대한 부를 요구한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극히 가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부할 수가 있다.

이 세상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며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에 속한 구원과 구원에 따르는 축복을 경험하게 해주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요케 되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누가복음 12:16-21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질에 있어서 부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요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란, 믿음의 부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혜로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은혜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간직하고 있는 풍부한 믿음과 사랑만이 중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안에서 부요한가? 만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다면, 그는믿음에 부요케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귀히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편애를 나타낸다면,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부자는 가난한 자가 받지 못하는 인정을 세상으로부터 받을지는 모르나, 가난한 자들이 그렇게 하였듯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으로부터는 결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부자들은 영적으로 부요를 누리는 것이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디모데전서 6:17-18에서 사도 바울은 부자에게 좋은 충고를 하였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마음을 높이지 말고 확실치 않은 재물을 신뢰하지도 말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게 하고 또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딤전 6:17-18)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자는 선한 일들을 많이 하는 자이다. 부란 풀의 꽃과 같아서 지나가며 오래가지 못한다(약 1:10-11). 또 부자 자체도 영구하지 않다. 따라서 부란 자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목사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강조하는 목사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기복 신앙이며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성경은 절대로 가난한 사람을 정죄한 일이 없다.

부요한 것이 꼭 축복이 아니며 또한 가난한 것이 저주도 아니다. 우리의 부와 가난함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과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삶이 주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며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약속의 상속자로 삼으셨다.

“또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지 아니하셨느냐?"(2:5)

이 말은 부자들은 저주를 받고 가난한 자들은 자동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들이 보잘 것 없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로 삼으셨다(마 25:34).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신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후에 부자 청년은많은 소유를 가졌으므로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마 19:22).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의 가난은 세상이 보기에 가난할 뿐, 믿음으로는 부자이고 약속하신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들도 하나님의 왕국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들의 가난 때문에택함받은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지만 큰 부자들도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막 10:23, 눅 12:34).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전 1: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부자들을 편애하는 것은 그릇된 일일 뿐 아니라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순종 모두 바르게 될 것이다.

우리와 함께 약속하신 왕국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가난하다고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2. 은혜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말라(2:6-7).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택하시고,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을 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하시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부자만 영접하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느냐고 야고보는 책망한다. 그리고 부자에 대한 편애를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했다.

“그러나 너희는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겼도다. 부자들은 너희를 학대하고”(2:6)

부자들이 저지른 죄는 무엇인가? 본문에 보면 세 가지가 나온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가고, 그들을 부를 때 쓰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한 것이다.

이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은혜로 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은혜로 대하는 것인 아닌가?

(1) 사람을 학대하는 것

부자들은 너희를 학대하고”(2:6)

이 사회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한다.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괄시한다. 횡포를 휘두르고 착취한다. 가진 권력으로 학대한다. 조금 부하다고 가난한 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무시하려든다.

『학대하다』라는 말은 “지배권을 행사하다”, “압제하다”, “압박하다”, “억누르다”라는 뜻이다. 칙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누군가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부에다 자기 마음을 집중시키는 사람은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난한 자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제도가 바뀐다 할지라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속의 악함은 변치 않았다. 그것은 단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또 더욱 교활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을 따름이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부자의 문제는 새롭게 생긴 사안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언급하고 있다(렘 7:6, 22:3, 겔 18:7, 암 4:1, 8:4, 말 3:5).

가난한 자에게 대부가 필요하면 부자는 빌려주면서도 간혹 너무 많은 이자를 요구했다(하나님의 법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자 받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출 22:25을 보라).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지주들과 상인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일이 흔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자기 땅에서 밀어내어 더욱더 가난한 사람들이 되게 하였다. 이는 결국 사람을 은혜로 대하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2) 사람을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가는 것

“부자들은…재판석 앞으로 너희를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2:6)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과 관심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전형적인 태도였다. 그들은 빚을 갚지 못한 가난한 자들을 재판석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에 부유한 대금업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이용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채권자인 부자가 길거리에서 채무자 가난한 자를 만나면, 문자 그대로 그를 붙잡아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갔다. 성경은 사람들 사이에 정당한 불평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해결 방법은 더 폭넓고 더 건강해야 한다. 그 방법에는 용서와 화해와 보상을 포함해야 한다. 이 모든 문제를 믿는 자들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마 5:23-26, 고전 6:1-8).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그들의 사악한 행위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법도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부한 자의 편에 선다.

부자는 자신들의 행동을 법적으로 정당화시킨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 권리조차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다 누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것이 부자의 횡포이며 사람을 은혜로 대하지 않는 증거이다.

(3) 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것

“그들은 너희를 부를 때 쓰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2:7)

부자들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부를 때 쓰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했다. 사도행전 13:45을 보면 안디옥에 온 유대인들이 그런 행동을 했다.

일반적으로 모독한다는 말은 불평한다는 것이요, 쉽게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소속된 주님의“귀한 이름을 모독”(2:7)한 자들이 바로 부자였다.

그들의 이런 편파적인 행동은 그분의 영광스런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돈을 많이 가졌다는 이유에서 부자를 높이고, 돈이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비이성적이다.

 

□ 결론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부자들이 그 사회에서 보여 주고 있는 역할을 상기시킬 때 주의하여 들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학대자들이었다(2:6). 부자들은 다음과 같이 하여 다른 이들을 학대하였다.

■ 그들과 그들의 생계 수단을 착취하였다(2:6)

■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였다(2:6)

■ 그들의 정체성을 공격하였다(2:7)

 

파일은 첨부를 다운로드하세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33 피 흘린 발자취 특강 4편 음성 파일 file 2016.09.29 461
» 은혜로 사람을 대하라. file 2015.09.10 804
31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file 2015.09.10 3222
30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file 2015.09.10 510
29 물질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file 2015.09.10 474
28 엘리야의 기도 file 2015.09.10 447
27 병든자의 기도 file 2015.09.10 442
26 믿음의 기도 file 2015.09.10 350
25 기도하고 찬송하라. file 2015.09.10 373
24 고난과 인내 file 2015.09.10 394
23 하나님의 말씀위에 든든히 서는 교회 file 2015.09.10 464
22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 file 2015.09.10 383
21 삼위일체 하나님 file 2015.09.10 416
20 하나님의 속성-불변 file 2015.09.10 391
19 하나님의 속성- 사랑 file 2015.09.10 447
18 하나님의 속성-긍휼 file 2015.09.10 382
17 하나님의 속성-은혜 file 2015.09.10 387
16 하나님의 속성-거룩 file 2015.09.10 449
15 하나님의 속성-의와 공의 file 2015.09.10 482
14 하나님의 속성-편재 file 2015.09.10 589
XE1.11.6 Layout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