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김정식 2015.09.10 11:30 조회 수 : 3222

* 야고보서 강해 설교 # 17 2008. 11. 2(오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 3:1-2

□ 서론

생명의 샘이 되라!

이 세상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이다.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낫게 해줄 수도 있다. 당신의 입은 생명의 샘인가, 아니면 재잘거리는 개울인가?

“한 번 헛디딘 발걸음은 곧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결코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 Benjamin Franklin

“충분한 지식과 경건한 마음과 거룩한 생활의 뒷받침 없이 쉽게 내뱉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허영과 자기 만족과 영적 교만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Curtis Vaughan

"악한 말을 내뱉는 질병은 다른 죄들보다 더욱 추악하다." - John Calvin

성숙한 그리스도인

야고보서 주제는『그리스도인의 성숙』이다. 야고보서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완전』이며, 그 말은『성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핵심은『성숙한 그리스도인 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에서는『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에서는『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임을 가르친다.

이제 야고보서 3장에서는『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혀를 제어(bridle)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행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말이 많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정도는 혀를 제어하는 삶과 연관지을 수 있다.

자기의 혀를 제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야고보서는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위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야고보 선생은 그의 관심을 혀의 제어에다 두고 있다.

믿음의 증거

만일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믿음에는 증거가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증거의 중심은 제어된 혀이다. 어떤 의미에서 야고보는 그의 관심을 행위로부터 언어(말)로 옮겼다.

즉 참된 믿음은 선행을 산출해 낼 뿐만 아니라 언어(말)까지도 제어시킨다. 야고보서 3장은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제어되지 않은 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호된 질책을 하고 있다.

성경의 다른 곳이 혀의 사용을 언급하고 있지만, 야고보서 3장 만큼 직접적으로 이 주제에 관심을 둔 곳은 없다. 어쩌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 혀의 사용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을 것이다.

몸된 교회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혀로 동료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훼손시키는 일이 많이 있다.

혀를 제어하는 힘

야고보는 인간의 몸에 있어 가장 제어하기 힘든 혀라는 지체가,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를 아주 생생한 언어로써 묘사했다. 실지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혀를 사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어떠하냐? 과연 그 혀는 주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제어되고 있는가?”

믿음은 사람에게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생동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몹시 다루기 어려운 혀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제어되어 질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 혀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협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사람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흔히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의 대화 속에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곤 한다. 참 다루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우리의 혀처럼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야고보서는 계속하여 혀와 관련된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1:19).

“너희 가운데 신앙심이 있어 보이되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아니하고 자기 맘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심은 헛것이니라.”(1:26).

“너희는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 받을 자들처럼 말하고 행하라”(2:12).

혀의 파괴성

우리는 혀의 파괴성을 예외 없이 잘 안다. 민감하고 진지한 그리스도인 들이라면, 혀를 잘못 사용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에 금이 가게 된 때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인간의 지체 중에서 혀보다 더 문제를 야기시키는 지체는 없다. 모든 인간의 죄는 거의 말로써 성립되고 자극된다. 그 말은 분노, 유혹, 냉소, 아첨, 비판, 위장, 속임 등의 언사로 나타난다.

혀는 타다 남은 불 찌꺼기를 맹렬한 불길로 타오르게 하는 세찬 바람이다. 몸의 다른 지체들은 나이와 함께 수그러질지라도, 성화되지 못한 혀만은 계속 악독한 세력을 발휘한다.

늙어지면 젊은 패기는 사라지고 많은 꿈들이 흩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즐거운 소망 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나이를 먹으면서 덕스럽지 못한 악한 말이 튀어나오기가 쉽다.

그러므로 젊은이나 늙은이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혀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제어시키고 의의 도구로써 잘 사용되게 해야 한다. 특히 말을 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부적절하게 선택된 단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려 상처를 주고, 분노를 일으키며,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혀는 강력하며, 잠재적으로 악할 수 있고, 지독하게 변덕스럽다.

의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할 혀

그리스도인들은 혀를 사용할 때 우리의 혀로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모욕하는 일을 피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혀를 사용하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의 혀는 의의 열매를 거두기(약 3:18)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행위를 말로 대체시켜 버리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골칫거리들이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제어되어야 한다. 비록 혀가 몸의 지체 중 작기는 하지만 그 위력은 대단하며, 특히 사람을 타락의 길로 몰아넣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고, 낙심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좌절감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주며,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혀를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혀를 잘 다스리고 참 지혜를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신다. 야고보의 가르침과 도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혀를 새롭게 하시도록 우리를 안내해주는 지침이 된다.

1. 너도나도 선생 되려 하지 말라!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아노라.”(3:1)

『내 형제들아』- 이는 새로운 주제가 거론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 야고보는 어떤 신학적 틀이나 사회학적 통계를 손에 쥐고서 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너도나도 선생 되려 하지 말라. 남을 가르치려고만 들고 권위만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지 말라.”- 선생의 책임이 매우 크고 중대함을 깨닫고 그 명예나 지위만 탐내지 말고 신중히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딤전 1:7 참조).

(1) 왜 사람들이 많이 선생이 되려고 했는가?

선생이 된다는 것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는가? Rabbi나 선생(master)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 아이들에게는 가장 최고의 소망이었다. 유대교도들의 뜨거운 열망 중의 하나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교도들은 지도자를 대단히 존경하였었다. Rabbi가 되는 것은 유대교도들의 선망이었고, 지도자들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Rabbi라는 말 자체가『위대한 사람』,『존경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유대교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들은 유대교도들이었을 때, 그의 지도자들을 존경하듯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였다. 그 존경심은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 결과 초대 교회 안에 많은 갈등과 문제를 빚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서 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선생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갈망하고 있었다.

초대 교회에서 선생은 큰 영향력과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엡 4:11). 선생이 드물었기에 각 선생은 많은 일을 하였으며, 가르치는 일이 교회 사역의 중심이었다.

(2) 위대한 교회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세력 다툼과 자리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선생이 되는 것은 특권이다. 그러나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교회는 선생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종이 많은 교회이다.

지배하려는 사람, 잔소리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훌륭한 교회가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위대한 교회인 것이다.

우리는 남들을 비판할 권리가 있고, 남들의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사실상 그들의 선생으로 간주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자신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본문 말씀은 결코 교회의 공적 가르침의 사역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항상 일으키신다. 그들의 수효는 전체 성도들의 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럴지라도 본문의 경고에 따라 가르치는 사역에 나서는 일은 신중히 해야 한다. 선생들은 주로 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을 제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릇된 교리를 가르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을 선전함으로 교회 내에 분열을 조장할 수도 있다.

(3) 선생이 되는 것의 위험

본문(3:1)은 교회에서의 견책이나 개인적인 권면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서로 격려해 주고 훈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참된 겸손의 자세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말하려는 요지는 비판적인 정신이다. 소위 잘 안다고 떠드는 자들의 오만한 자세는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비판적인 정신은 교회 회중에게 심각한 손상을 끼친다. 유감스럽게도 교회에는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만 똑똑하고 남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간주하는 우월감이다.

그런 사람들은 늘 남들의 일에 유감이 많고 비협조적이며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듣기 좋은 말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때때로 꾸중이나 견책이 필요하고 경고나 권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에는 고자세나 우월감에서 남을 누르거나 가르친다는 식의 교만한 마음이 없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심한 말을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러 듣기 힘든 말을 해야 할 경우에는, 겸손한 자세와 가슴아파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으로 하였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런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빌 3:18-19

(4) 내가 선생이 되려고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내가 선생이 되고 싶은 동기가 무엇인가? 남보다 잘나고 싶은 생각이 그 마음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남에게 지식이 많고 능력이 있고 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나서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람들은 남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자세와 동기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처럼 전혀 다른 것이다.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적합한지 평가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 나는 남을 섬기려고 가르치고 있는가?

- 나는 교회에서 내 지위나 직위를 높이려고 애쓰지는 않는가?

- 나는 의무감에서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 선생들은 무엇보다도 신실함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내용을 잘 전달하는 교사가 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과 말이 모두 하나님의 평가 앞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은 경솔하거나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2.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이유 3:1-2

(1) 선생의 책임이 훨씬 무겁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아노라.”(3:1)

가르침은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

성도들이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일이지만,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가볍게 시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르침은 중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선생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커지는 것이고, 책임이 커진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너도나도 선생이 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선생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기준에서 엄격한 판단과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가 말한 바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큰 의무가 있다.

선생이란 지위는 하나님 앞에 큰 책임이 따르는 신분이다.

이것은 어떤 내용을 다루는 데 있어 정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말에 있어 좌우로 치우치지 않음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가르침을 전해야만 하는 책임이 포함된다.

선생은 그 지위에 따르는 인정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보다 엄중한 관찰 하에 놓이게 된다. 가르치는 일을 맡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보다 엄한 요구를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생이라는 직무를 통해 얻게 될 유익보다는, 우리 자신이 가르치는 직무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큰 정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지 말라!

그렇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선생이 되는 것을 저지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 일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그 직무에 따르는 위험과 책임을 지적해줌으로써 그 자리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일에 합당한 영적인 자질이 구비되지 못한 사람들이 급하게 뛰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선생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르치는 일에는 더 큰 책임이 따르고 문제를 일으킬 잠재력이 더 크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야고보의 목적은 우리들이 두려워서 아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발언에 따르는 큰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 즉시로 자신들을 더 엄격한 표준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일은 꼭 수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는 자신들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생된 자들이 더 큰 정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시켜가며 많이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다.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아노라.”

예수님은 가장 혹독한 정죄의 선언을 거짓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퍼 부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만들면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2) 우리는 모두 실족(실수/잘못)하기 때문이다(3:2).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3:2a)

야고보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우리가 실족함이 없다면, 우리는 정죄로부터 벗어날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가 다 실족(잘못)하기 쉽기 때문에, 야고보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3:1).

야고보 자신도 그러한 허물이 있는 자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보편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자신은 제외한 채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손가락질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3:2a)

야고보는 자신을 말에서 실족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다. 야고보는『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우리는 그의 솔직함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야고보는 혀의 사용에 대해 말하는 그 심각한 일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이것으로 부터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조차 완전함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특히 말(언어)에서 실족(잘못)한다.

우리는 모두 자칫 방심하면 실족한다. 우리는 모두 실족하지만, 특히 말하면서 가장 많이 실족(실수)한다. 어디를 막론하고 붙어 다니는 이 조그마한 혀만큼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없다.

여러 가지 일들로써 우리 모두는 넘어지기가 쉽다. 그러나 말(word)에서 실족(잘못)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혀를 다스리기에 매우 어려움을 느낀다.

말에서 실족(잘못)하기가 쉽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말하는 것을 제어해 주시도록 더욱 의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와 생각과 말의 선택과 심지어 우리의 의사소통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까지 지키실 수 있다.

우리는 말에서 실족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부족함과 죄악된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혀를 잘 제어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성숙을 드러낸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말(word)에서 실족한다.

이 말의 실수는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특별히 지도자들은 말에서 실족하기가 더 쉽다. 이는 지도자들은 말을 많이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말에 따라는 실족도 많은 것이다.

아무도 완전하지 않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생애 속에서도, 말(word)에서 치명적인 실족(잘못)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항상 인간은 혀로 범죄할 가능성을 안고 산다.

이것은 계속 불완전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핑계는 물론 될 수 없지만 인생의 현실임에는 틀림없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엡 1:4)라고 명하셨다.

혀의 사용을 조심하라!

야고보는 교만한 혀의 사용이 지닌 위험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들의 연약성을 인정한다면, 잘난 척하는 말이나 남을 헐뜯는 악담들을 삼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말에서 실족(잘못)하기 쉬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정말 인식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실족(잘못)에 보다 너그럽고 자신의 오류의 가능성 때문에 함부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발밑에서 배우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 선생으로 나서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또한 타인의 연약성을 동정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형제를 대하게 된다.

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님을 욕되게 하는데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음담을 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화가 났을 때는 저주하는 말을 하는데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또 그것은 무익한 험담과 부정직한 반쪽 진리를 말하는데도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혀를 잘못 놀린데 대한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이미 앞서 간 성도 중, 가장 온유했던 모세마저도 거친 말을 사용했다. 오순절 날 위대한 메시지를 선포했던 베드로 또한 혀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베드로는 특별히 자기를 과신하는 실수가 있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눈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 12:18)

(3)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그는 곧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3:2)

말(언어)에서 실족(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선생들이라고 해서 말에서 실족(실수)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바르게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의미는 성숙하다는 말이다.

우리 중 아무도 이 땅에서 죄 없는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문에서“완전한”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혀의 제어 능력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말의 잘못이 적을수록 그 사람은 그 만큼 성숙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한 참된 표시는 그가 얼마나 혀를 잘 다스릴 수 있느냐로 알 수 있다. 혀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온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성숙한 자임을 암시한다.

말에서 실족하지 않으면 온 몸도 제어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말에서 실족하지 않으면 온 몸은 승리로운 생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말에서 실족하는 것은 우리의 전인적인 행동이 중대한 오류를 범하도록 만든다.

야고보는 자기 입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온 몸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 몸 전체를 완전히 길들인 자가 없다. 더구나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인 혀를 제어한 자가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본문은 우리가 성도로서의 삶을 날마다 영위하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함과 동시에 혀의 긍정적인 역할도 암시해 준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사랑, 성령님께서 주시는 자기 절제력이 우리가 이런 통제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혀는 비록 부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주님의 통제 아래 있으면 선한 목적에 이바지될 수 있다.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는 유용한 수단은 혀의 긍정적인 능력이다.

□ 결론

야고보는 너도나도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 이유는 첫째, 선생의 책임이 훨씬 무겁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모두 실족(실수/잘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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